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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공간의 사회학

by 윤바다씨 2023. 12. 20.

공간의 사회학

우리는 근대적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근대적 시간을 표상하는 시계의 바늘을 따라 우리의 사고나 행동은 절단되고 채취된다. 지도에 그려지는 형태나 위치, 거리와 같은 요소로 환원되는 동질화된 공간, 혹은 공장과 기계로 상징되는 근대적 새안의 장이나 도시와 고층빌딩으로 표상되는 근대적 생활의 장. 우리의 삶은 생산에 관한 것이든, 재생산에 관한 것이든, 혹은 생활에 관한 것이든 이 근대적 세계 속에서 이뤄진다.

이 세계에 속하는 자로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면, 아마도 사적인 삶의 장인 집과 생산의 장인 공장, 그리고 교육의 장인 학교가 아닐까? 이 세 가지 사회적 장은 근대인이라면 누구든 대개는 통과해 가야 하는 영역이다. 이 세 영역의 조합은 근대의 개인들의 삶을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전적으로 포괄한다. 가정과 학교는 어린이의 생활을 , 가정과 공장은 노동자의 생활을 등등.

이 세 가지 영역은 근대적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새로이 태어나거나 진입하는 사람들을 근대적 삶으로 끌어들이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 이들 세 영역은 개개인을 근대적 삶에 적절히 부응하여 살아갈 수 있는 근대인으로 만들어내는 장이다. 이 세 영역에서 개개인을 근대인으로 생산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근대적 삶 자체는 결코 정상적으로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근대적 세계 자체의 동요와 위기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상적으로 근대적 삶의 방식을 반복하여 재생산할 수 없는 세계는 자신의 질서와 지속성을 유지할수 없다. 뒤집어 말하면, 근대적 세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존속하기 위해선 개개인을 일상적으로 근대적 주체로 변형시키고 길들이는 조건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세 가지 기본적인 영역이 개개인을 근대인으로 생산 내지 재생산하는 영역이라는 점을 추론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바로 이들 영역에서 개개인을 근대인으로 만들어 가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가정과 학교, 공장 등은 그것을 거쳐 가는 개개인을 근대적 형태로 생활하고 행동하도록 만드는 특정한 힘을 행사한다. 그것은 개개인이 특정한 형태의 생활방식을 습득하고 반복하게 하는 영역이며, 그것을 통해 개개인은 근대 사회에서 요구되는 주체가 된다. 따라서 그 영역 각각은 개인들의 행동과 사고에 특정한 양상의 힘이 작용하는 일종의 사회적 장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근대 사회에 태어난 어떤 사람이나 대개는 거쳐 가는 경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긱본적인 사회의 장이다.

근대인을 생산하는 방식을 주체생산방식이라는 말로 정의하고 이를 주로 공간적 배치와 관련하여 검토할 것이다. 다시 말해 가정, 학교, 공장 등 각각의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간적 배치의 양상이 이 연구의 중요한 관심사이다. 

나아가 이 각각의 영역에서 배치의 양상과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비교가 필요하다. 즉 그 각각의 배치들이 갖는 고유성은 무엇이며, 구체적 양상과 형태는 또 어떻게 서로 다른지, 그것들을 근대적 배치라는 동일한 말로 포관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통일성 내지 동형성이 있는지 하는 것이다.

거기서는 직접적 생활공간으로서 주거공간의 배치에 대한 것으로 연구의 대상을 제한하려고 한다. 그 제한의 직접적 이유야, 다루어야 할 폭과 내용의 범위가 하나의 책으로 포괄하기에는 지나치게 넓다는 점 때문이지만, 세 가지 기본적인 영역 가운데 가정 내지 주거공간을 우선 선택하는 데에는 별도의 이유가 없진 않다. 마르크스가 잘 지적했듯이, 공장은 그 직접적인 작동방식이 개개인을 근대의 새로운 규율에 길들이는 것을 목적으로 발생했다.

이 목적을 위해서, 또 나태와 방탕 또는 낭만적인 자유의 환상을 근절하기 위해서, 나아가서 구빈세의 경감과 근로정신의 조장 및 메뉴팩처에서의 노동가격 인하를 위해서, 자본의 충실한 대변인인 우리의 에카르트는 공적 자선에 의지하고 있는 이러한 노동자를 하나의 이상적 구빈원에 가두어 두자는 든든한 수단을 제안한다. 이러한 집은 공포의 집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의 혼이 아직 꿈만 꾸고 있던 1770년의 피구휼민을 위한 공포의 집이 불과 몇 년 뒤에는 매뉴팩처 노동자 자신을 위한 거대한 구빈원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공장이었다.

학교도 공장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규율이 교육과 훈육을 주요 목적으로 한다는 것은, 특히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 사회에서는 명시적인 것이었다.

1772년 포웰은 교육이 근면한 습관을 훈련시키는 것이라고 여겼다. 어린이들은 6~7세에 이르면 이미 노도오가 피로에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나아가 그것을 습관화해야 한다. 윌리엄 터너 목사는 1786년 뉴캐슬에서 쓴 글에서 레이크스의 학교를 질서와 규칙의 표본으로 추천했다. 그리고 글로스터의 아마 및 대마 공장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학교의 영향으로 특별한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확언하였다. 그들은 유순하고 순종적으로 바뀌었고, 다투거나 나쁜 짓을 하는 것은 덜해졌다. 일단 교문을 들어서면 아이들은 엄격한 시간 규율을 지켜야 하는 새로운 세계에 있게 되었다. 요크 지방의 감리교 주인학교에서는 교사들도 시간을 어기면 벌금을 물어야 했다.

따라서 공장이나 학교의 경우에는 그 효과를 낳는 구체적 양상이 규명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작용하는 힘의 벡터가 어떠한 방향을 갖는지는 상대적으로 쉽게 예상할 수 있고 검토할 수 있다. 반면 가정은 개개인이 그 피곤한 공적인 삶에서 그 규울의 직접적 작동에서 물러나 쉴 수 있는 영역이란 점에서 위의 두 영역과 대비된다. 더구나 근대에 이르러 출현한 프라이버시와 , 그것을 보장하는 사적 공간은 그 안에서 작동하는 벡터의 방향이 공장이나 학교와는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따라서 가정 내지 주거공간에서 배치와 그 배치가 작동하는 방식에 때 해서는 결론적인 벡터의 방향을 쉽게 추론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반대의 추론을 용이하게 한다. 공적 공간과 사적공간이 대립이 그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 근대인은 두 개의 전혀 상이한 장 속에서, 상반되는 힘의 작용 안에서 생활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근대 내지 근대성이란 개념을 생활양식 내지 사회적 주체의 특징을 포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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