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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주거공간의 혼성성

by 윤바다씨 2023. 12. 21.

첫 번째 밀레니엄의 고비를 넘기면서, 흔히 암흑과도 같은 어두운 음색으로 발음되는 서양의 중세라는 시기 속에, 어둠을 걷는 새로운 색조의 빛들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생산의 새로운 능력으로 인해 살갗에 달라붙은 궁핍의 고통이 덜어짐에 따라, 금세라도 닥칠 듯하던 심판의 날이 삶의 새로운 희망이 성장하는 만큼 멀어지고, 지옥의 불길이 뿜는 연기가 그 멀어진 거리만큼 서늘해지면서, 연옥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연기와 유예의 공간이 탄생했던 시기였다.

12세기 이래 꽃 피우기 시작한, 고딕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건축양식은 요새와도 같은 방벽으로 둘러친 로마네스크의 어두운 공간에 새로이 과감한 빛을, 화려하게 채색된 새로운 빛을 끌어들였다. 생드니의 쉬제 신부가 만들어낸 이 새로운 신의 나라가 그 새로운 생산력의 산물이라고만 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그러한 생산력이 만들어낸 여유, 삶의 여유와 사고가 여유와 무관하다고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북구의 무거운 대기를 관통하면서 찌를 듯 하늘로 올라가던 이 화려한 성당들의 시대에도, 그리고 그 이후의 시대에도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 그렇게 화려하고 거대하게 지어지지는 않았다. 지금은 아름답다는 미적 판단이 대상이 되는 성들도, 대개는 사방에서 조여 오는 적들의 압력으로 인해 좁게 오므라들고, 단단하게 응어리진 것이었다.

미적 취향이 전면에 자리 잡은 ,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이 거주공간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또 다른 하나의 문턱을 넘어서야 가능했던 것 같다. 그것은 보통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시기로서 유럽은 물론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교역의 영토를 통해 새로이 거대한 부를 집적한 거대 사인가문들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피렌체가 그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확산되는 중심점이 되었던 것 역시 이런 점에서 이들의 거대한 부와 밀접하게 결부된 것이었다.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십서가 발견되면서 고전적 형태와 비례로 구성된 건축의 새로운 코드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신에게 봉헌되는 종교적 영역을 벗어나 세속적 건축물을 향하게 되며, 그에 따라 팔라초라고 불리는 궁전과도 같은 대저택들이 본격적으로 지어지게 되었던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징후가 다양한 양상으로 부상하던 시기였고. 중세라고 불리던 이전 시대가 가을로 접어들게 된 시기였다.

이렇게 지어진 건물들의 외부를 비례와 대칭성이라는 수학적 형상, 주범이라는 고전적 형태가 장악해 간 것과 더불어, 그 내부에서도 새로운 시대의 징후는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새로운 종류의 방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방들을 특정한 목적에 따라 이용하려는 시도들, 주인의 공간과 하인의 공간을 가르고 분별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징후일 뿐이어서 훗날 만들어진 것들에 연결되고 그것의 전조로 해석됨으로써만 불별은 그 의미를 갖게 될 뿐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팔라초 역시 아직은 다양한 활동,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뒤섞여 살고 생활하는 혼성적인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중세라고 불리는 시기 안에 있었다.

중세의 생활과 주거공간

중세의 생활이 폐쇄적인 어떤 결사체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으며, 그것의 영향력은 개인적인 , 혹은 사적인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개입하고 간섭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점에서 엄격한 의미의 사생활 내지 프라이버시가 없었다는 것, 그리고 가족 내부에서도 정서적인 내밀성이 없었다는 것은, 흔히 이러한 요소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근대적 생활방식과 언제나 대비되고 대조되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조나 대비는 결코 결백하지 않다. 대개는 대비의 양상은 프라이버시의 결여나 내밀성의 부재처럼 다루어지기 십상이다. 그리고 개인적 인격의 결여나 부재와 은밀히 겹치며 만들어지는 가치평가가 그 대비의 선을 가로질러 관통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현재를 기준이자 척도로 두고, 그것을 투사하는 이러한 대비와 대조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루이스 멈포드의 눈에는 그처럼 프라이버시라는 개인적 삶의 영역도 없고, 연인들 간의 내밀한 관계도 보장되지 않는 중세도시의 가족이 근대적인 것보다 훨씬 더 개방적인 세계로 표상된다. 즉 중세의 가족은 붐 자식이나 핏줄을 나눈 친척은 물론, 함께 살며 일하는 도제나 노동자들, 그리고 하인들까지 포함하며, 그들의 공통의 삶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방적인 단위였다. 또한 노동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아서 주거공간과 작업장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다.

작업장이 가정이었고, 상인의 상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족 구성원은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방에서 일하고, 같은 방에서 혹은 공동홀에서 잠을 잤으며, 가족기도에 참가하고, 공동오락에 참여했다. 조합 자체도 일조오의 가부장적 가족이었으니, 가정 내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도시정부와는 전혀 별개로 형제들에 대한 작은 범법사건을 처벌하고 벌금을 물렸다. 이 노동과 가정생활의 친근한 결합은 중세기 가정집의 살림살이를 좌우했다.

하나의 가족과 그 외부자의 경계도 매우 가변적이고 약했다. 친소관계에 따라 함께 거주하는 가족의 외부는 친지와 친구, 이웃으로 구분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집에 드나드는 것이 자유로웠으며, 많은 경우 서로 초대하고 방문하며 함께 지냈다. 로지아, 이웃집, 널찍한 벤치로 둘러싸인 도시의 광장들은 날씨가 좋은 아침이나 저녁이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자주 집으로 손님을 초대했고 이 집 저 집으로 자주 오고 갔다. 손님에 대한 이러한 환대는 잘 사는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덜 잘 사는 사람들도 재력이 허용하는 한 자신의 집을 친척과 친구, 이웃에게 개방했다. 심지어 어떤 이유에서건 방랑하는 외부인에 대해서도 적절한 음식과 잠자리를 대접하는 것이 귀족들의 경우 관대함과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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