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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서양미술사/세계의 정복자들.1~4세기까지의 로마

by 윤바다씨 2023. 12. 14.

우리는 앞서 로마의 한 마을이었던 폼페이가 헬레니즘 미술을 여러 모로 반영하고 있음을 보았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이 세계를 정복하고 헬레니즘 왕국들의 폐허 위에 그들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는 동안에도 미술은 그다지 크게 변화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작업했던 대부분의 미술가들은 그리스인들이었고 대부분의 로마 수집가들은 그리스 거장들의 작품이나 복제품들을 사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세계의 지배자가 되자 미술은 어느 정도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술가들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고 거기에 따라 그들의 방법을 적응시켜야 했다. 로마인들이 이룩한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아마도 토목공학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들의 도로, 수로, 공중목욕탕 등에 대해 알고 있다. 이러한 건축물들의 유적은 아직도 매우 인상적으로 보인다. 로마의 거대한 기둥들 사이를 걸어가노라면 마치 자신이 한 마리의 개미처럼 왜소하게 느껴진다. 사실상 후대의 여러 세기 동안 '위대한 로마'를 잊을 수 없게 한 것은 바로 이 유적들이었다.

로마 건축 가운데 유명한 것은 콜로세움이라고 알려진 거대한 투기장일 것이다. 그것은 후세에 많은 찬탄을 불러일으킨 특징적인 로마 건축이다. 그것은 일종의 실용적인 건물로서 내부의 거대한 계단식 관람석을 받쳐주는 아치들로 이루어진 세 개의 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로마의 건축가는 이 아치들의 정면 벽에 그리스식 건축형태들을 심어 넣었다. 사실상 그는 그리스 신전에 사용되었던 세 가지 건축 양식을 전부 사용한 셈이다. 일층은 도리아식의 변형으로서 심지어 메토프와 트리글리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층은 이오니아 양식이고 삼층과 사 층은 코린트식 반원주이다. 로마식 구조와 그리스식 형식 또는 '주식'과의 결합은 그 이후의 건축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우리들 자신의 마을을 둘러보아도 이러한 영향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콜로세움의 새로운 면은 건축에 있어서 아치의 사용이다. 사실상 로마인들은 그리스 건축가들이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리스 건축에서는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던 이 아치라는 창안을 광범하게 사용했다. 따로 떨어진 쐐기 모양의 돌들로 아치를 건조해내는 것은 토목공학이 이루어낸 매우 어려운 업적 중의 하나이다. 일단 이 기술에 숙달되자 건축가는 점차 대담한 설계에 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다리나 수로의 기둥들을 아치로 연결시킬 수 있고 심지어 궁륭으로 된 천장을 건조하는데 이 방식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건축 중 가장 놀라운 것은 판테온, 즉 범신전이다. 그것은 아직도 예배의 장소가 되고 있는 유일한 고전시대의 신전이다. 그것은 초기 기독교 시대에 교회당으로 바뀌었으므로 황폐하게 되지 않았다. 그 내부는 궁륭형 천장과 꼭대기에 바로 하늘을 볼 수 있는 둥근 구멍이 뚫린 거대한 둥근 방이다. 창문은 없다. 그러나 실내 전체는 위로부터 풍부하고 고르게 빛을 받아들인다. 나는 이와 비슷한 차분한 조화의 인상을 풍기는 건물을 별로 알지 못한다. 거기에는 묵중한 느낌이란 전혀 없다. 거대한 돔은 마치 또 하나의 하늘처럼 당신의 머리 위에 자유스럽게 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스 건축으로부터 그들이 좋아하는 요소를 따 와서 그들의 필요에 알맞게 적응시키는 것이 로마인들의 특징이었다. 그들은 모든 방면에서 이와 같이 했다. 그들이 주로 원했던 것 중의 하나는 실물과 같은 훌륭한 초상이었다.

그러한 초상은 로마인들의 초기 종교에서 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의 장례행렬에는 선조의 밀랍 초상을 들고 가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이러한 관습은 고대 이집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슷한 형상이 영혼을 보존시켜 준다는 믿음과 연관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나중에 로마가 제국이 되자 황제의 흉상은 종교적인 외경감으로 우러러보아야했다. 우리는 모든 로마인들이 충성과 복종의 표시로 이 흉상 앞에서 분향해야 했으며 기독교도들이 이러한 요구를 들어주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처형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초상의 엄숙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그리스인들이 했던 것보다 더 실물처럼, 조금도 미화함 없이 있는 그대로 초상을 만드는 것을 허용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들은 때때로 데스 마스크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머리의 구조와 생김새세 관해 놀라운 지식을 얻었을 것이다. 하여간 우리는 폰페이우스, 아우구스투스, 네로 또는 티두스의 생김새를 마치 뉴스 영화에서 그들의 얼굴을 보았던 것처럼 알고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흉상에는 아첨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를 신처럼 보이게 하는 점은 하나도 없다. 그는 부유한 은행가나 선박회사의 우두머리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로마 초상들에는 자질구레한 구석이 없다. 어쨌든 미술가들은 사소한 데로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실물 같은 초상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로마인들이 미술가들에 맡겼던 또 하나의 과제는 고대 오리엔트에서 본 바 있는 관습을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다. 그들 또한 그들의 승리를 널리 알리고 전역의 이야기를 널리 전하고 원했다. 예를 들어 트라야누스 황제는 다키아에서의 전쟁과 승리를 모두 그림으로 보여주는 연대기로서 거대한 기둥을 건립했다. 거시서 우리는 로마군대가 상륙하여 야영하고 전투하는 장면 들을 볼 수 있다. 수세기동안 그리스 미술이 이룩해 낸 모든 기술과 업적은 전승기록이라는 작업 속에 구사되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본국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전적에 대한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한 정확한 세부묘사와 자세한 설명을 중시했으므로 미술의 성격을 어딘가 변화시켰다 미술의 주된 목표는 더 이상 조화나 미 또는 극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로마인들은 지극히 실제적인 민족이었고 공상적인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한 영웅의 행위를 이야기하는 그드리의 회화적인 방법은 이 광대한 제국과 접촉을 갖게 되는 여러 다른 종교들에 커다란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