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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서양미술사-위대한각성.기원전 그리스

by 윤바다씨 2023. 12. 14.

오리엔트의 전제군주 아래 가장 초기 양식의 미술이 탄생한 곳은 태양이 무자비하게 작열하고 강물에 연해 있는 토지에서만 식량이 생산되는 거대한 오아시스 땅이었다. 이 양식들은 수천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채 존속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방의 제국들과 경계를 접하고 있는 동부 지중해의 크고 작은 많은 섬들, 그리고 그리스와 소아시아 반도들의 들쑥날쑥한 해안이 있는 보다 온화한 지방의 경우는 사정이 이와 매우 다르다. 이 지역들은 한 사람의 통치자에 예속되지 않았다. 이 지방들은 모험적인 뱃사람들이나 또는 광활한 해양을 항해하며 무역이나 해상 습격을 감행해서 얻은 엄청난 재화를 그들의 성이나 항구에 추적해 놓은 해적왕들의 은신처다. 이 지역의 중심지는 원래 크레타 섬으로서 이곳에는 때때로 매우 부유하고 강력한 왕들이 출현하여 사절단을 이집트에 파견할 정도여서, 크레타의 미술은 그곳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크레타 섬을 지배한 종족이 누구이며 그리스 본토, 특히 미케네의 미술이 어디서 이식되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최근의 발견에 따르면 크레타인들은 초기 형태의 그리스어를 사용한 것 같다. 그 후 기원전 1000년경 유럽의 호전적인 종족이 험한 그리스 반도와 소아시아 연안까지 침투해 와 원주민들을 정복했다. 우리는 다만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통해서만 이러한 장기전에서 파괴된 당대 미술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종족도 이들 새로운 정복자 가운데 속한다.

이들이 그리스를 처음 지배하던 몇백 년 동안 이들이 만든 미술 작품은 매우 거칠고 원시적으로 보인다. 이들에서는 크레타 양식의 쾌활함이란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딱딱한 점에 있어서는 이집트인들을 능가하는 것 같다. 그들의 도기는 단순한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장식되었으며, 어떤 정경을 묘사할 때에도 엄격한 문양 속의 일부분을 이룬다. 예를 들어 도판 46에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서 죽은 사람은 관을 놓은 대위에 누워있으며, 좌우에 서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든 원시사회 추도식의 공통적 풍습대로 머리 위에 두 손을 올리고 있다. 이러한 단순성과 명료한 배열에 대한 기호는 이 초기 그리스 시대의 건축 양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며, 이상하게도 우리네 도시와 마을에도 그런 양식이 남아있다. 도판 45는 도리아족의 이름을 딴 고대 양식의 그리스 신전이다. 엄격하기로 이름난 스파르타인들도 도리아족의 한 줄기였다. 이 양식의 건축물에는 참으로 불필요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적어도 우리가 그 목적하는 바를 알 수 없는 구석이란 전혀 없다. 아마 초기에는 이런 신전들을 목재로 지었던 것 같으며, 신상을 모시는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이 있고, 그 주변에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튼튼한 지주들이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기원전 600년경 그리스인들은 이 단순한 건축양식을 돌로 모방하기 시작했다. 나무기둥들은 돌로 된 큰 대들보들을 받치는 원주들로 바뀌었다. 이 대들보들은 아키트레이브라고 불리며, 기둥 위에 이쓴 부분 전체는 엔타블라처라고 불린다. 이 윗부분에서 우리는 목재 구조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이 부분은 마치 대들보의 끝이 나와 보이는 것 같다. 이 들보의 끝부분은 세 갈래의 홈으로 길게 파여있어서, 그리스 말로는 트리글리프라고 부른다. 두 개의 트리글리프 사이에 낀 벽면은 메토프라고 부른다. 목재 건조물을 모방한 것이 분명한 이 초기 신전들의 놀라운 점은 전체로서의 단순성과 조화이다. 만약 건축가들이 단순한 정사각형이나 원통형 기둥을 사용했더라면 이 건물은 무겁고 둔중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 대신 그들은 원주의 모양을 중간 부분이 약간 부풀게 하고 위는 차츰 가늘게 만들었다. 그래서 기둥들은 탄력성 있게 보이며, 기둥 모양이 짓눌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주지 않은 채 지붕의 무게가 기둥들을 가볍게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물체가 힘 안 들이고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신전들은 크고 당당한 것도 있지만 이집트 건축물처럼 거대하지 않다. 그것들은 인간에 의해서 지어졌고 인간을 우해서 건립된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상 ㅇ그리스에는 모든 사람을 노예화할 수 있었거나 노예화하려고 했던 신격화된 지배자는 없었다. 그리스 종족은 여러 작은 도시와 항구들에 살고 있었다. 이런 작은 공동체들 사이에는 경쟁과 마찰이 많았지만, 그 도시들 중 어느 하나도 다른 모든 공동체 우에 군림하지는 못했다, 

이 그리스 도시국가들 중에서 아티카의 아테네는 미술사상 가장 유명하고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미술사 전체를 통해 가장 위대하고 가장 놀라운 혁명이 바로 여기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혁명이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그리스에서 최초의 석조 신전들이 건립되던 기원전 6세기 무렵으로 보인다. 그 이전까지 고대 오리엔트 제국의 미술가들은 그들 특유의 미술 형태를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었다, 그들은 자기네 선조들의 미술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본받으려 노력했으며, 그들이 배운 신성한 규칙을 엄수하려고 애썼다. 그리스 미술가들이 석상을 제작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남긴 업적을 발판으로 출발했다. 도판 47은 그리스 미술가들이 이집트의 모델을 배워 익혀, 청년의 입상을 어떻게 만들고 신체의 각 부분과 근육을 어떻게 구분하는가를 습득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입상은 이 그리스 미술가가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일정한 공식에 따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실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분명히 무릎의 진정한 모습을 알아내려고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뚜렷하게 성공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가 만든 조상의 무릎은 심지어 이집트 조상들의 무릎보다 오히려 박진감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가 옛날의 처방에 따르는 대신 그 자신의 관점을 갖기로 결심했다는 데 있다.